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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천국잔치 맛보기

endlesslove 2018. 8. 28. 13:29

성찬 :천국잔치 맛보기

 

 

 

 

출판사: 그라티아

저자: 이성호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세 가지 표지가 있다. 첫째는 순전한 말씀의 선포이고 둘째는 성례의 신신한 시행이며 셋째는 권징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이 세 가지를 잘 시행하고 있는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나마 말씀의 선포는 설교를 들으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면 성례는 어떠한가?

 

 

성례가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표지 중에 하나인데 과연 성례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고 시행하는 교회는 얼마나 되는가?

 

무엇이든지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교회가 건강해지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성례를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성례의 의미를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이성호 교수의 성찬, 천국잔치 맛보기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성찬이란 과연 무엇이며 지금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찬에 대한 미흡한 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보다도 평신도들도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 이성호 교수는 서울대에서 서양사를 공부한 후,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리차드 멀러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수년가 가르치고 현재는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1장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식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먼저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풍성한 먹거리를 주셨다. 선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먹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누리게 하셨다. 또한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는 만나를 주셨다. “만나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목적은 분명하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에만 그들에게 양식이 되었다. 많이 거두어도 소용이 없었다. 남겨 두면 썩어서 음식 쓰레기가 되었다. 안식일 전 날에 이틀 분의 양식을 거두지 않으면 안식일은 평안의 날이 아니라 배고픔의 날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백성들에게 만나를 통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가 있다. 유월절 식사는 개인적인 식사가 아니었다. 가족식사였다. 게다가 식구가 너무 적으면 어린 양 한 마리를 그날에 다 먹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 이웃과 더불어서 잡았다. 따라서 유월절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들을 돌아보는 절기였으며, 유월절 식사는 거대한 무리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먹는 공동체 식사였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도 제자들 식사하신 사건들도 기억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한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예로 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여기서 보듯이 주님을 영접하면 그분과 함께 식사를 나누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2장에서는 성찬의 본질에 대해서 다룬다. 저자는 성찬의 본래 의미는 식사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영어로는주의 만찬을 의미한다. “왕이신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식사가 바로 성찬이다. 만약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이해한다면, 성찬에 제대로 참여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무엇인가를 먹었다는 생각을 하여야 하고 배부름을 느껴야 한다.” 그러면서 시편 23편을 예로 든다. 시편 23편 마지막부분에서 왕이신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며 함께 식사하신다. 저자는 이 장면이 성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의 잘 못된 가르침으로 성찬의 의미가 상당히 잘 못 이해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찬의 본질을 식사로 이해하게 된 것은 종교개혁이 참 교회에게 가져다 준 큰 선물이다. 종교개혁 이전, 거짓교회인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찬을 미사라고 부르면서 성찬의 본질을 희생제사로 이해하였다. 미사에서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해되었다. 떡이 떼어질 때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해되었다. 떡이 떼어질 때 예수님의 살이 찢겨지고, 포도주가 부어질 때 예수님의 살이 찢겨지고, 포도주가 부어질 때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다고 믿었다.

 

결국 십자가에서 드려진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오늘날 똑같이 재현된다고 이해하였다. 두 제사의 차이는 단지 양식의 차이일뿐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사를 피 있는 제사라고 하고, 미사를 피 없는 제사라고 부른다.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유일한 제사를 드렸지만, 그 제사를 오늘날도 드려야만 죄사 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성찬을 희생제사로 이해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현저히 욕보이는 죄를 범하고 있다.”

 

 

 성찬을 희생제사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되고 반대로 식사로 보게 된다면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받는 것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교회는 죄사람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뭔가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 감사의 찬송을 부를 뿐이다. 성찬도 어떤 의미에서 제사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제사는 희생제사가 아니라 감사제이다.”

 

 두 번째로 성찬이 갖는 의미는 교제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통함이 성도의 교제인데 이 때 교제가 성찬이라는 것이다. “누가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2:42) 여기서 교제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달 알려진 코이노니아이다.

 

그리고 이 단어에 해당하는 라틴어가 바로 코뮤니오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떡을 떼는 것과 교제하는 것이 밀접하게 병행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는 성찬을 제외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교제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지만 제대로 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성찬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지 않고 어떻게 참된 교제를 누릴 수 있겠는가?”

 

 

 세 번째로 성찬은 화목의 식사라고 한다. “주께서 베푸신 식사인 성찬이야말로 죄로 인하여 그분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어떻게 화목하게 되었으며 그분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를 가시적으로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을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이 되어 자져가 갖는 모든 특권을 모두 다 누리게 되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여 그분이 베푼 식사를 함께 즐김으로 그분의 약속이 단지 빈말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저자는 그러므로 성찬이 주께서 베풀어주시는 화목의 선물이라면 이것이 확대 되어서 성도들은 서로 미움, 시기, 질투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성찬은 먼저는 성도끼리 화목하는 자리요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복된 소식을 전하여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여 평화와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먹는가?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이다. 화체설이란 말은 본질 혹은 본체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 물이 있다. 물은 세 가지 현실태, 즉 액체, 수증기, 얼음으로 존재한다. 물론 이 경우에는 본질은 변하지 않고 양태만 변할 뿐이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양태는 변하지 않으면서, 본질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겉모습은 떡 그대로지만 그 떡 속에 있는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로 변한다는 것이 화체설이다. 따라서 성찬에서 축성된 떡은 더 이상 떡이 아니고 예수님의 실제 살이다. 로마교회는 이 화체설이야 말로 이것은 내 몸이다.’ 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의 이러한 주장은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둘째는 상징설이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쯔빙글리와 같은 이들은 떡은 예수님의 살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상징으로서의 떡이야 말로 성찬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주장하였다.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사진 그 자체는 결혼식과 유사성이 없다. 단지 과거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당사자는 그 사진을 통해서 과거의 기뻤던 순간을 회상 하면서 즐거워한다. 그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회상하게 하는 기억력에 있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식도 마찬가지이다. 떡을 보고 먹으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회상한다. 결국 각자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회상한다.” 저자는 이 상징설의 문제는 성찬의 신비를 제거해 버렸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 “이 신비를 너무 합리적으로 설명해 버렸다. 그 결과 성찬이 은혜의 수단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행사가 되어 버렸다.”

 

 

셋째는 루터파의 견해인 공재설이다. 루터는 기독론을 성찬에 그대로 대입해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디에나 편재하듯이 신성이 있는 곳에는 몸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성찬을 행할 때 떡과 함께, 떡 속에, 꺽 위에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떡을 먹으면 그리스도의 몸도 함께 먹는 것이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떡을 가리켜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떡을 가리킬 때에는 떡만이 아니라,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떡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의 몸도 동시에 가리키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화체설을 따르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만을 먹지만, 공재설에 따르면 떡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도 같이 먹게 된다.”

 

 넷째는 영적, 실재적 임재설이다. 칼빈이 가르쳐 온 바이고 우리가 따르는 견해이다. “칼빈은 임재를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과 정반대로 해석한다. 그 당시 임재라호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화체설도 공재설도 이 점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승천하셔서 존귀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다시 이 땅으로 끄집어 내리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칼빈에 따르면, 이것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반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으로 내려 오신다기 보다, 땅에 있는 우리가 하늘로 들려 올려 져서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그러한 임재이다. 이점에 있어서 승천의 교리가 칼빈의 성찬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땅에 있는 신령한 몸인 교회가 성례전적 몸인 성찬을 통하여 연결 된다고 말한다.

 

 

 4장에서는 성찬의 실천적인 방안들을 소개한다. 먼저는 직분자들의 능동적인 예배 참여이다.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는 능동적인 참여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성찬예배에서는 집사나 장로가 떡과 잔을 나누는 예전에 참여함으로 예배의 봉사자라는 의식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성찬은 제사가 아니라 식사이므로 제사에 제사장들이 가운을 입듯이 가운을 입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매 주일 예배에 성찬이 있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하며 특별히 매주 성찬을 시행할 수 있는 작은 교회들이 말씀과 성찬 중심의 예배를 드리므로 대형교회와 차별화된 교회로 세워 나갈 것을 권면한다.

 

 모든 교회가 일 년에 두 번에서 네 번 정도 성찬식을 시행한다. 그런데 매우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성도들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성찬식 때 은혜를 받았다는 분들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차라리 잃어버린 성찬이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성찬을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시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찬이 없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는데 오늘날 성찬식은 세례를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하는 정도로 비춰진다. 이러한 때 성찬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는 책이 있어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에서 성찬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고 또 매주 하지 못하여도 매 달하지 못하여도 성찬을 시행할 때마다 원래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교회에 주신 목적대로 은혜와 기쁨과 참된 교제가 넘쳐나게 된다면 이 시대의 교회는 많은 것들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성찬의 바른 의미를 알고 싶어하는 모든 분들이 이 책을 통하여 유익을 얻었으면 한다. 이 책의 두 가지 장점은 첫째는 내용이 쉽다는 점이다. 신학을 모르는 평신도들도 읽으면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둘째는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성찬의 깊이 있는 의미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교회의 성찬이 회복되기까지는 목회자 몇 사람이 무엇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성찬을 알아야 한다. 부디 이런 귀한 책들이 널리 보급되어서 많은 성도들이 읽고 배우고 실천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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