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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

endlesslove 2018. 9. 4. 00:00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

 

 

                                                                                 

 

출판사: 부흥과 개혁사

저자: 박재은

 

  기독교에서 칭의의 교리만큼 중요한 교리는 없다. 그런데 칭의 교리는 늘 공격을 받아왔었다. 중요한 만큼 잘 못된 해석과 이단들의 공격도 많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교회에서 칭의 교리를 잘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간단하게만 가르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교회에서 칭의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는 어디에서 이 구원의 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인가? 오늘날 개신교는 불신자들로부터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라고 조롱을 받고 있다.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이 주 이유이지만 그 이면에는 잘못된 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 하나 하나의 교리들이 모여서 하나의 신학을 형성한다. 그런데 교리적체계가 잘 못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겉으로는 교회의 도덕적 타락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은 다시 바른 신학과 바른 교리를 배우고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여기 칭의 교리를 잘 설명해주는 귀한 책이 있다. 이 책을 천천히 읽고 이해해 나간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박재은 박사는 총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구원론, 기독론, 개혁파 정통주의, 청교도 신학 등을 비롯하여 개혁신학 전반에 관심이 많으며, 바르고 균형 잡힌 개혁신학이 성도의 삶과 교회의 체질을 바꿀 수 있다는 소망으로 신학을 하고 있다.

 

  1장에서는 과거에 주장되어 온 잘 못된 칭의론을 소개한다. 먼저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칭의론이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을 딴 칭의 개념이다. 그 사상적 후예들은 항론파라 불렀다. 이들을 칼빈주의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해 항변서 형식으로 다섯 가지 논제를 주장했는데, 부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가항력적 은총, 구원의 탈락 가능성 등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칭의론의 핵심은 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아르미니우스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기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 행위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믿음을 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습니다. 믿는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믿는 행위에 칭의의 공로를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믿음을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결과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는 약화되었습니다. 중간지식 개념을 차용하여 인간의 자유 선택에 구원의 결과를 맡김으로써, 하나님의 구원론적 주권이 심각하게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 잡기에 실패한 칭의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반율법주의 칭의론을 다룬다. 반율법주의는 안티노미아니즘, 율법폐기론으로도 불린다. 반율법주의는 17세기 영국에서 나타난 사상인데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다가 인간의 역할을 경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 아르미니우스 칭의론과 대적하기 위해, 반율법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반대로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칭의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의 동기 자체는 칭찬받을 수 있겠지만, 반율법주의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 반대 방향으로 추가 기울어진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신율법주의 칭의론을 다룬다. 신율법주의는 아담의 실패로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로워 질 수 없게 되었는데 이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율법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면 의로워진다는 것이 신율법주의의 주장이다.

 

 

네 번째로는 하이퍼칼빈주의가 등장한다. 하이퍼칼빈주의는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나게 된다. “하이퍼 칼빈주의 칭의론은 마치 17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재판인 듯 보입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이 최우선으로 가진 관심은 칭의의 방정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그 무엇보다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칭의를 하나님의 영원 속 내재적 행위와 동일시했으며, 그 결과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 실현되는 칭의의 시간적 성격이 무시되었습니다. 하이퍼 칼빈주의에서는 칭의가 하나님의 내부에서 끝나버립니다

 

  다섯 번째는 영원 칭의를 다룬다. 영원 칭의는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영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인리히 헤페가 강조한 것처럼, ‘죄인을 의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 작정칭의 자체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합니다. 영원 칭의의 개념이 가진 문제점은 바로 이 두 개념을 같은 것으로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즉 칭의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 작정은 영원성을 갖고 있지만, 칭의 자체는 시간성을 지닙니다.”

 

 

 

  2장에서는 현대의 균형 잃은 칭의론을 다룬다. 첫 번째는 주재권 논쟁을 자세하게 다루면서 무상은혜의 단점을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두 번째는 페더럴 비전의 칭의론을 다룬다. 페더럴 비전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율법주의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페더럴 비전의 칭의론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의롭게 하는 믿음에 대한 전총적인 이해를 순종하는 믿음으로 치환하여 오직 믿음의 원리를 흔들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칭의의 방정식에서 참된 믿음과 참된 순종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신학적 결과를 보입니다.”

 

  세 번째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칭의론을 다룬다. 새 관점 학파의 뼈대는 언약적 신율주의이다. 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언약적 신율주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노력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샌더스는 유대인이 선택되어 하나님의 언약을 맺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인한 인간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언약적 신율주의의 틀로 볼 때 유대교는 더 이상 율법주의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가 됩니다. 샌더스의 언약적 신율주의의 구조 속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샌더스는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근거한 선택으로 가능하며, 언약 안에 머무는 것은 계명을 준수하는 순종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새관점 학파 사람인 톰 라이트의 주장을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라이트에게 칭의의 근거는 하나님과 메시아 예수의 언약적 신실함입니다. 칭의란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하기보다는, 한층 더 큰 구원의 그림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신 그 신실함을 믿는 자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언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라이트가 이해하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교리는 개인이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구원론의 형식을 가진다기 보다는, 개인이 언약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과 관련되는 교회론의 형식을 가집니다.”

 

  또 라이트는 칭의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한다. “라이트는 칭의란 의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인 하나님이 법정에서 사람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 된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입증된 하나님의 언약 백성 회원권을 소유한 상태입니다.”

 

라이트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미래의 칭의 부분이다. “가장 많이 논란이 되는 부분은 바로 미래 칭의가 전체 삶에 근거해공개적으로 확증할 내용을 현재 칭의가 믿음에 기초하여 지금 확증해 준다는 라이트의 표현입니다. 라이트는 미래의 칭의가 삶에 근거한다는 주장은 자기 스스로의 주장이 아니라 바울의 주장이라고 한다.

 

미래의 칭의에 대한 이런 라이트의 입장은 행위 구원론의 아류 혹은 반 펠라기우스주의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라이트는 이런 비판에 반격할 요량으로 성령론을 통해 미래 칭의와 삶의 관계를 설면하려고 시도합니다. 라이트에 따르면, 살았던 전체 삶에 근거해 미래 칭의가 확증된다는 말은 삶의 방식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성령 하나님이 온 삶을 이끄셔서 온전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만드신 다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3장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균형을 잃은 칭의론의 회복으로 균형잡힌 개혁주의 칭의론을 설명한다. 능동적인 칭의와 수동적인 칭의, 객관적인 칭의와 주관적인 칭의를 논의하면서 죄인의 칭의는 능동적인 칭의에서 획득되고 수동적인 칭의에서 적용 완성되어지는 균형잡힌 칭의론을 설명함으로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칭의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획득된 의의 전가를 근거로 법정에서의 하나님의 선언이며, 죄인들이 믿을 때 각자에게 적용되어 완성되는 것이다3장에서는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 헤르만 비치우스의 논의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칭의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이신칭의를 강하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신앙생활의 내용에서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을 띄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는 칭의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준수를 강하게 주장함으로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율법주의적인 신자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책이 신학이나 교리 공부를 하지 않은 일반성도들이 보기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칭의 논쟁의 역사를 이 작은 책에 잘 정리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누구든지 이 책만 잘 소화 한다면 그릇된 칭의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용어나 주장에 대한 좀 더 쉬운 설명들이 각주 형식으로 라도 들어갔으면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이미 오래전에 교리교육을 포기하였다. 목회자들 자체가 교리를 싫어하는 기형적인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니 평신도들은 무지의 바다에 빠져 있다. 이렇게 좋은 책들이 계속 출판되고 성도들이 이런 기회들을 통해서 교리를 잘 배우고 정리해서 이 땅의 교회들이 아름다운 교회들로 자리 잡기를 소원해 본다. 이 책을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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