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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

endlesslove 2018. 9. 5. 00:30

성화, 균형 있게 이해하기

 

  

 

 

출판사: 부흥과 개혁사

저자: 박재은

 

 

  구원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은 즉각적인 구원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잘 가르치지 않고 정확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는 구원이 바로 점진적인 구원인 성화의 구원이다.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성화의 구원을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성품이 좋은 것에 초점을 맞춰서 가르치는지 모른다. 성화의 구원을 등한시 하는 배경에는 교리교육의 부제와 목회자들의 신학적 무지가 크다 하겠다. 예수 믿어 구원받고 그 다음은 순종하여 복 받는 것으로 점철된 교회생활에는 성화의 구원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열심을 내서 결국 복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참된 기독교의 내용인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복 받기 위해서 하는 순종으로는 복을 받을 수 없다. 복 받으려고 하는 모든 헌신과 순종과 충성은 자기 공로를 쌓는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복을 추구한 죄악이다.

 

  한국교회가 이름이 땅에 떨어진 채로 살게 된 배경에는 구원의 도리 하나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에 책임이 크다. 이제라도 다시금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교회들이 늘어나야 할 것이다. 참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참된 성도가 거룩의 길을 걸어 갈 때 그들의 삶이 세상에서는 빛과 소금으로 나타날 것이다.

칭의에 이어서 성화에 대하여 잘 정리하여 알려주는 귀한 책은 박재은 교수님께서 내 주셨다. 이 책을 통하여 성화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널리 퍼져가기를 소원한다.

 

 

 

  1장에서는 과거의 균형 잃은 성화론들을 소개한다. 먼저는 로마 가톨릭의 성화론이다. 로마 가톨릭의 의화 교리는 그릇된 인간론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는데 이 때 형상은 자연적인 의이고 모양은 덧붙여진 초자연적인 은사라는 것이다. 모양은 타락과 함께 상실하였지만 자연적 의인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어서 여전히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게 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질 때 인간은 이 은총을 거부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이 세례를 통해 주입된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될 수 있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공로를 쌓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강조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통해 공로가 되므로 사실상 세미 펠라기우스 주의가 되고 만다. “비록 하나님의 은총으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자유선택과 공로가 꽤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여 끝을 맺는 구조를 가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화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역할 사이의 시소게임에서 온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하기 힘듭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의와 자유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는 로마 가톨릭 성화론을 바라보며 반 펠라기우스주의 색채가 느껴진다라고 말한 바빙크의 말에 적극 동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극단적인 루터파의 성화론이다. 먼저 루터가 말한 성화론을 이해하려면 루터의 인간론을 이해해야 한다. 루터는 죄인은 신자가 된 이후에도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다.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다. 여기에 낯선 의가 등장한다. “인간 내부로부터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외부로부터 오는 낯선 의입니다.” 이 낯선 의는 행복한 교환을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가 서로 행복한 교환을 하게 되는 것이빈다. 여기서 교환되는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낯선 의, 즉 그리스도의 의입니다이렇게 행복한 교환으로 의롭게 된 인간이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루터는 내주하는 죄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성화란 신자의 인간 본성에 뿌리박혀 있는 내주하는 죄와 평생에 걸쳐 대항하는 지속적인 싸움입니다.” 루터가 가진 성화론의 한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화론을 풀지 못한 점이라고 한다.

 

 

  루터가 말하는 성화의 최종점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루터는 요한1서 강해에서 성화의 최종점을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그와 교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화의 최종점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이요 그의 신성에로의 참여인 것입니다.”

  계속이어서는 콜브뤼게가 주장한 반율법주의적인 극단적인 성화론을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의 반작용으로 루터가 인간의 무능을 강하게 주장하며 죄와의 싸움을 주장는데 이제 다시 변질이 나타난 반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여 인간의 역할을 없애버린 반율법적인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2장에서는 근현대의 성화론을 다룬다. 먼저는 오벌린 완전주의를 소개한다. “오벌린 완전주의란 오벌린 대학의 학장, 교수들이 웨슬리주의적 완전주의를 변용, 발전시켜 주장한 사상을 가리킵니다. 오벌린 완전주의 사상은 대표적으로 두 사람에 의해 주장되었는데 오벌린 대학의 교수였던 찰스 피니와 초대학장을 지낸 매헌 학장이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매헌의 주장을 저자는 길게 설명해 나간다.

 

  “매헌은 기독교적 완전은 완전하게 성화되고, 흠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데, 이는 우리의 의지, 지성, 정신적 민감성, 육체적 경향성 전부를 아우르는 포관적인 완전입니다. 의지로서의 완전은 우리의 모든 자발적인 생각이 하나님의 의지에 온전히 순응하는 것을 뜻하며, 지성으로의 완전은 무엇이 악하고 무엇이 악이 아닌지를 인지하는 것을 뜻하며, 정신적 민감성과 관계된 완전은 인간의 모든 느낌 감정이 하나님의 법아래 위치함을 뜻하며, 육체적 경향성과 관계된 완전성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육체를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함을 뜻합니다. 매헌은 이런 완전을 전체의 완전 성화라고도 표현하며 이런 전성화가 바로 기독교적 완전의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전체의 성화, 기독교적 완전의 상태는 이 땅에서 획득 가능할까요? 매헌은 기독교적 완전의 상태는 이 땅에서 획득 가능할 뿐 아니라 실현 가능하기도 하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매헌은 이런 성화를 획득하는 방법은 기도라고 말한다. 이 땅에서 완전 성화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매헌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이점에 대해서 워필드의 글을 인용한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완전의 획득 가능성의 궁극적인 원인을 그리스도와 성령께 두었지만 더 깊은 논리 속에는 기독교적 완전의 획득 가능성을 열어 두시는 그리스도께 인간이 먼저 헌신해야만 한다는 논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벌린 완전주의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 B.B. 워필드는 매헌이 기독교적 완전을 위해 그리스도를 도구화하여 인간 성화를 위해 필요한 초자연적 수단쯤으로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 아니라 워필드는 매헌의 성령 사용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과 조명을 통해서만 기독교적 완전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본 매헌의 논리는 마치 성령 하나님을 완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정도로 평가절하한다고 보고 매헌을 강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케직 운동을 다룬다. 저자는 케직 운동을 이렇게 소개한다. “케직 운동이란 1875년 영국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케직이란 작은 휴양 도시에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케직 운동은 초교파 운동으로 웨슬리주의, 성결주의, 오벌린 완전주의, 광의로서의 복음주의, 개혁주의까지 다양한 교단의 신학과 사상이 혼재되었던 운동이었습니다. 케직 운동은 더 고상한 삶운동으로도 불립니다. 더 고상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중생 시 받은 신분상의 성화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 하나님이 내리시는 두 번째 축복전 성화필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케직 운동에서 주장하는 성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케직 운동에서는 성화가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이야기 한다. 케직에서 말하는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단독 사역을 의미한다. 그래서 케직 운동의 유명한 모토는 “Let go and let Got”이다. “케직 성화론에서는 인간의 행위는 절대 거룩함에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케직 지도자 홉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당신 자신이 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한다면 그것은 당신 고유의 힘을 쓰는 것이다. 당신 고유의 힘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내려놓는 것,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케직 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빈 그릇처럼 당신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빈 그릇을 채워 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의 고유한 일이다.’ 즉 성화는 인간 내,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이루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는 결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케직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케직 운동에 대한 다양한 비평이 있었는데 저자는 워필드의 예를 들어 말한다. “성화의 수동성을 강조한 케직 가르침은 마치 행동보다는 묵상에 강조점을 둔 경건주의의 아류처럼 보인다고 비판했습니다. 워필드는 케직 성화론이 주장하듯이 만약 성화의 방정식 안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신다고 말할 때 종국에는 반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해진다고 경고했습니다. 반율법주의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므로 인간의 행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논리를 뜻합니다.”

 

 

  또 제임스 패커의 비판도 소개한다. “신자의 성화는 능동성을 갖추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케직 신학이 강조하듯이 성화 역시 하나님의 사역인 것은 백번 동의하지만 하나님이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사역을 해 나가신다는 점을 케직 성화론이 놓치고 말았다고 패커는 옳게 지적합니다.”

 

 

  3장에서는 균형 잡힌 성화론을 소개한다. 균형잡힌 성화론으로는 존 머레이와 바빙크의 성화론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존 머레이는 결정적 성화와 점진적인 성화로 설명해 나가고 있다. “바빙크가 결정적 성화 개념을 주장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머레이 당시 유행하던 성화론은 성화의 방정식에서 인간의 역할/책임이 너무 큰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즉 머레이는 결정적 성화 개념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인간중심주의적 성화론을 혁파하고자 했습니다. 둘째, 전통적인 미국 장로교 보수신학이 지나치게 점진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머레이는 우려했습니다. 이에 대해 머레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신약 성경은 성화의 특징을 과정으로 보지 않고 단번의 결정적 사건으로 보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너무 자주 간과했던 것은 사실이다.’

 

  결정적 성화/점진적 성화론은 점진적 성화론을 약화 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신학자들이 있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결정적 성화 개념은 점진적 성화 개념을 약화 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화시킵니다. 머레이가 강조하득싱 결정적 성화 개념은 신자의 거룩한 정체성과 거룩한 상태의 현 상황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끊임없이 다시 성화의 자리에 서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 성화 개념이 점진적 성화 개념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1) 불완전한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적 기원으로부터 성화가 힘 있게 시작되기 때문이며,

(2)거룩한 자라고 하는 신자의 정체성은 죄의 자리로 가는 순간순간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상기하게끔 도와줌으로써 죄로 향하는 발걸음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어 줄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3)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함을 공유한 상태에 있는 참된 신자들은 죄와 적극적으로 싸워 나가는 죄 죽임의 고행을 억지로 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며,

(4)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가 더 이상 신자의 삶에 본질적인 주인 노릇을 못하기 때문에 순례자의 길을 가는 신자들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성화의 교리를 너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가 계속해서 말해 온 것 같이 균형을 잃은 성화론이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나왔었다. 로마 가톨릭의 세미 펠리기우스적인 성화론을 종교 개혁자들이 반대했고 곧바로 반율법적인 성화론이 등장을 하고 다시 이에 반하여 다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성화론이 나오는 계속해서 시소게임 하듯이 균형을 잃은 성화론이 등장해 왔다.

 

 

  저자는 역사 가운데 있어 왔던 중요한 성화교리들을 잘 설명하면서 건강한 비판으로 바른 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마지막 장에서는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른 성화 교리를 소개하고 설명함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역시 아쉬운 점은 교리적 지식이 없는 성도들이 읽을 때 이해 할 수 있도록 좀 더 자상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평신도들이 읽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이 있다. 천천히 책을 읽으면 따로 설명을 듣거나 배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자세한 설명이 있다면 성화교리 설명의 완전학습서로도 손색이 없을 책인데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아쉬운 점은 존 머레이나 바빙크 이전의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의 성화론을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은 점이다. 책에서 소개한 균형 잡힌 성화론이 존 머레이 개인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신앙의 선배들이 동일한 주장을 해왔으며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교리임을 밝혔으면 좋았을 듯하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미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성화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쳐 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직도 성화에 대한 균형을 잃은 이해들이 유행을 하고 있다. 잘못된 교리가 유행하는 이유는 신학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압도적으로 많은 장로교회들에서 라도 성화에 대한 이 바른 교리들이 잘 가르쳐졌으면 하고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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